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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 노트 · 1부 · 마음이 먼저다

오디세우스도 가장이었다 — 영화 「오디세이」, 어느 가장의 20년 귀향기

2026-08-06 · 레사남 · 원문 레사방 62편

미리 말해둔다. 이 글에는 영화 「오디세이」의 주요 장면과 결말 이야기가 나온다. 아무 정보 없이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은, 영화를 먼저 보고 오는 것을 권한다.


극장을 나서며

놀란 감독의 「오디세이」를 보고 왔다.

3천 년 전 이야기다. 트로이 전쟁에서 이긴 영웅이 집으로 돌아가는 데 10년이 걸렸다는, 학창 시절 어디선가 제목만 들어본 그 이야기. 나는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상한 경험을 했다. 스크린 속 오디세우스에게서 자꾸 내가 보였다.

그는 영웅이기 전에 가장이었다. 사랑하는 아내와 갓 태어난 아들을 두고, 가고 싶지 않은 전쟁터에 어쩔 수 없이 나갔다. 이기고 돌아오는 길이 전쟁보다 길었다. 전쟁 10년, 귀향길 10년. 합쳐서 20년이다.

20년. 이 숫자에서 잠시 멈췄다. 내가 투자라는 바다에서 헤매며 잃어버린 시간이 꼭 그만큼이다(1편). 오디세우스는 20년을 바다에서 보내고 집으로 돌아왔고, 나는 20년을 실패하고 나서야 내 항로를 찾았다. 우연이겠지만, 나는 이 우연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사람,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들과 다를 게 없구나. 나도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가정을 지키기 위해, 돈을 벌기 위해 일터로 나갔다. 지금은 투자를 하고, 글을 쓰고, 투자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려고 웹사이트를 짓고 있다. 다른 가장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각자의 전쟁터로 나가서, 수많은 역경을 견디며 하루를 살아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영화 감상문이면서, 동시에 집으로 돌아가는 중인 모든 가장의 이야기다.

전쟁에서 이긴다는 것

영화 속 오디세우스는 승리한 뒤에도 편치 않았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누군가는 패자가 되어야 하고, 누군가를 짓밟아야 한다. 그는 그 과정에서 제우스의 법도를 어겼다며 괴로워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그 법도란 '크세니아'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낯선 타인을 존중하고, 내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하라는 것. 지금 내 앞에 있는 타인이 어쩌면 인간으로 변장한 신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전쟁은 이 법도를 지킬 수 없는 자리다. 이기려면 타인을 짓밟아야 하니까. 이긴 자가 이겼다고 웃지 못하는 전쟁이었다.

이 장면에서 나는 주식시장을 떠올렸다.

시장에서도 비슷한 그림을 자주 본다. 누군가 이득을 얻으면 누군가는 손해를 보는 싸움. 특히 단기 매매의 세계가 그렇다. 개미들이 죽어나가는 자리에서 기관과 외국인은 이익을 챙긴다. 정보력, 자금력, 속도. 무엇 하나 개미가 이길 수 있는 판이 아니다. 나도 그 전쟁터에서 20년을 싸웠고, 대부분 패자 쪽이었다.

생존이 오가는 이 싸움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나. 극장에 앉아 이 질문을 다시 곱씹다가, 내가 오래전에 내린 결론을 확인했다.

그런데 나는 주식시장이 전쟁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고 믿는다. 시장에는 모두가 이길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이다. S&P500과 나스닥100의 수십 년 차트를 보면 안다(5편, 6편). 단기의 파도와 폭풍우를 걷어내면, 그 아래에 장기적인 우상향이 분명하게 보인다. 이 길 위에서 장기투자를 선택한다면, 먼 훗날 모두가 승리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답은 살아남는 법을 익히는 게 아니다. 전쟁을 끝내고, 항해를 시작하는 것이다.

종목을 고르고 타이밍을 노리는 싸움은 누군가의 주머니를 노리는 전쟁이지만, 나스닥100 같은 지수에 장기로 투자하는 것은 경제 전체가 성장하는 배에 올라타는 일이다(30편). 거기서는 남을 짓밟을 필요가 없다. 오디세우스가 정말 원했던 것도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귀향이었다. 이기는 것과 돌아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는 이기는 걸 포기하고 나서야 돌아가는 길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긴 다음이 더 위험하다

외눈박이 거인의 동굴 장면.

오디세우스 일행은 거인의 눈을 찌르고 필사적으로 탈출한다. 그런데 빠져나오는 길에 오디세우스는 부하의 원수를 갚겠다며 화살을 한 발 더 쏜다. 거인은 더 크게 분노했고, 탈출 과정에서 사상자가 더 늘었다. 원전에서는 한술 더 뜬다. 이름을 밝히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왔으면서, 위험에서 벗어났다 싶어지자 배 위에서 섬을 향해 제 이름을 외친다. "나는 오디세우스다!" 그 외침 때문에 거인의 아버지인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원한을 샀고, 그 뒤의 10년 재앙이 시작됐다. 부하들이 그를 신뢰하지 않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이었다. 위험에서 벗어난 직후, 이겼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에 저지른.

투자에서 이 패턴을 얼마나 많이 봤는지 모른다. 폭락장을 잘 버텨낸 사람이, 계좌가 회복되고 수익이 붙은 바로 그 시점에 확신에 차서 판을 키운다. 레버리지를 늘리고, 몰빵을 하고, "이제 알 것 같다"며 원칙을 버린다. 재앙은 위기의 한복판이 아니라 위기를 벗어났다고 믿는 순간에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나의 20년에도 그런 장면이 여러 번 있었다.

바다는 이겼다고 외치는 자를 오래 기억한다. 나는 이 장면을 그렇게 읽었다.

세이렌의 노래는 지금도 들린다

세이렌 장면에서 나는 시간이 멈춘 듯했다. 너무나 현재의 이야기라서. 3천 년 전의 바다가 지금 우리의 삶을 계속 돌아보게 만들었다.

세이렌의 노래를 들은 선원은 홀려서 바다로 뛰어든다. 오디세우스는 어떻게 했나. 자기 의지력으로 버티겠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노래를 들으면 자기도 뛰어들 것을 알았다. 그래서 유혹이 오기 전에, 미리, 부하들을 시켜 자기 몸을 돛대에 묶게 했다.

이 시대에도 우리 귀에는 수많은 노래가 들려온다. 매일 쏟아지는 뉴스, 각종 투자 권유 방송, 매수·매도 타이밍을 잡아준다는 유튜버들. 나는 이미 여러 글에서 다 부질없는 유혹이라고 말해왔지만, 고백하자면 나조차도 이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20년을 데인 나도 그 노래가 들리면 귀가 솔깃해진다.

돌아보면 나의 과거는 오디세우스가 아니었다. 노래에 홀려 바다에 뛰어든 선원 쪽이었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오디세우스처럼 해낼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그래서 "나도 오디세우스처럼 했다"라고는 쓰지 못하겠다. 하려고 한다, 가 정직한 문장이다.

나는 지금 나를 돛대에 묶으려 하고 있다. 장기투자라는 밧줄, 분할매수라는 밧줄(13편), 현금을 확보해가며 투자하는 현금비율이라는 밧줄(14편, 21편). 유혹을 이기는 사람은 없다. 유혹이 오기 전에 자신을 묶어둔 사람만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실천해가려 한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마음이 무거워지는 지점이 하나 있었다.

나도 세이렌이 아닐까.

나는 내 주위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이런 유혹에 흔들리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블로그를 시작했다. 그런데 아무리 이야기하고 알려도, 듣는 사람에게는 내 이야기가 또 하나의 유혹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걸 안다. 장기투자 하라고, 분할매수 하라고, 현금을 확보해가며 투자하라고, 개별 종목보다 지수 ETF에 투자하라고. 내가 강조하는 것들도 누군가에게는 바다 위에 들려오는 수많은 노래 중 하나일 뿐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어떤 역할이고 싶은지를 다시 정리했다. 나는 노래하는 자가 아니라 밧줄이고 싶다. 유혹하는 목소리가 아니라, 유혹을 견딜 수 있게 해주는 밧줄. 내게 그 밧줄은 장기투자이고, 분할매수이고, 현금비율 전략이다. 나부터 이 밧줄에 나를 묶으며 실천해가려 하고, 구독자들에게도 "나를 믿어라"라는 노래 대신 각자 자신을 묶을 수 있는 밧줄 같은 도구를 내어주고 싶다. 숨기지 않은 실패의 기록, 데이터, 직접 돌려보고 확인할 수 있는 시뮬레이터. 지금 웹사이트를 짓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칼립소의 섬 — 풍요가 전부라면

여신 칼립소의 섬 장면.

오디세우스는 아름다운 여신 곁에서, 아무 부족함 없이, 풍요롭고 행복해 보이는 시간을 보낸다. 원전에서 칼립소는 그에게 불멸까지 제안한다. 여기 머물면 영원히 살게 해주겠다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 삶, 걱정 없는 풍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조건이다.

그는 거절한다. 그리고 늙어 죽을 아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다시 험난한 바다로 홀로 뛰어든다.

나는 이 장면이 이 영화가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의 풍요와 경제적인 부만이 행복일 수는 없다. 돈만을 좇는다면 그 끝에 진정한 행복은 없다. 진정한 행복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고, 경제적인 부는 그 삶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나는 행복한 생활을 해치면 안 된다는 것을 내 투자의 다섯 번째 철학으로 삼았다(34편). 칼립소의 섬은 그 철학의 3천 년 전 버전이었다. 목적지를 잊은 풍요는 감옥과 다르지 않다. 오디세우스는 그걸 알았기에 낙원을 버리고 바다를 택했다.

귀향 — 내가 눈물을 쏟은 자리

솔직하게 쓴다. 나는 이 영화의 후반부에서 눈물을 흘렸다.

홀로 고향을 향해 바다로 뛰어들고, 다시 생사를 오가며 험난한 바다를 건너 돌아오는 대목에서 처음 울컥했다. 그리고 마침내 고향 땅을 밟았는데, 20년 만에 돌아온 집에서 자신을 숨긴 채 아들을 만나고 아내를 만나는 장면에서, 나는 결국 눈물을 쏟을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역경과 유혹을 뿌리치고, 생사를 오가는 바다를 건너 그토록 그리던 집에 돌아왔는데, 정작 그는 벅찬 감정을 억누른다. 아내와 왕위를 노리는 세력들이 집안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안기고 싶은 순간에 자신을 숨기고, 마지막 싸움을 위해 남은 힘을 모은다. 20년을 기다린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죽었다는 말이 사방에서 들려와도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것만큼, 집을 지키는 것도 전쟁이었다.

그 과정에 나는 완전히 빠져들어 있었다. 그리고 스크린 위로 나의 젊은 날과 현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힘들었던 과정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그 모든 과정이 한 편의 영화가 되어 흘러갔다.

비록 오디세우스처럼 극적이지는 않았지만, 나의 이야기는 나에게는 그만큼 극적이었다.

우리 모두의 오디세이아

극장을 나오면서 정리한 생각은 이렇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바다 위에 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원치 않는 전쟁터에 나가고, 이기고도 쉽게 돌아가지 못하고, 곳곳에서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가끔은 칼립소의 섬 같은 달콤한 안주에 붙들리기도 하면서. 그래도 방향은 하나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 경제적 자유라는 것도 결국 별게 아니다. 그 집으로 돌아가는 뱃길이다.

그리고 이 긴 항해를 완주하는 방법은, 오디세우스가 이미 3천 년 전에 보여줬다.

전쟁에서 이기려 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려 할 것. 이겼다고 생각되는 순간에 이름을 외치지 말 것. 유혹은 의지로 버티는 게 아니라 미리 나를 돛대에 묶어둘 것. 풍요가 목적지가 아님을 잊지 말 것. 그리고 어떤 소문과 절망 속에서도, 믿음을 버리지 않고 기다려주는 사람들을 향해 계속 나아갈 것.

세부적인 내용은 언급할 필요도 없다. 누구나 자신의 인생이 그 어떤 영화의 이야기보다도 극적일 것이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가는 순간에도, 우리는 수많은 역경과 유혹을 견뎌내며 살아가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행복한 삶을 꿈꾸며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물론, 나도 포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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